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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금속공예명장

작성자 : career 2012-04-09 조회 : 4078











박창순 귀금속공예명장

“수작업으로 만든 작품이 더 아름답고 섬세해요”
























흔히 귀금속 공예라 하면 사치품이라고 생각하기쉽다. 하지만 비철금속인 금, 은, 동의 재료를 통해 희소성과 재화가치를 상품으로 탄생되는 게 귀금속공예다. 대량생산이 보편화되어 있는 요즘, 작품 하나하나에 혼을 담아서 고객들의 니즈에 맞추고 나만의 작품세계를 이어가는 사람들. 우리전통 고유의 맥을 이어가는 박창순 귀금속공예명장을 만났다.



한꺼번에 대량을 생산해내는 기계보다는 조금은 느리더라도 상품 하나하나에 혼을 담아서 만들어 내는 수작업은 어쩌면 구시대적으로 느껴진다. 그럼에도 우리 주변에는 장인의 혼을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 자본에 밀려 같이 한 동료들이 하나 둘 사라져갈 때 가슴이 저미는 한숨을 담아서 작품으로 토해내는 이들을 우린 장인이라고 부른다.

돈보다는 사명감이 먼저 이기에 긴 세월의 고통도 감내하는 이들이 그나마 위로 받을 수 있는 건 그 분야의 최고라는 명예일 터. 오직한 길만을 걸으면서도 행여나 마음이 흔들릴까봐 주변 조차 돌아보는 것에 인색했던 이들이 장인의 혼을 이어가고 있다. 오늘 만난 박창순 명장이 그런 장인 중 한사람이다.

누구나 그 분야의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힘든 과정을 겪어내는 인내가 필요하듯, 박 명장도 귀금속공예 최고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던 배경에는 인내의 골짜기를 수도 없이 넘고 넘어야 하는 고달픈 여정의 세월이 있었다. 그런 다음에 명장이라는 타이틀의 주인공이 됐다. 같은 분야의 동료들이 변화의 빠른 옷을 갈아입길 재촉해도 흔들리지 않았던 그는 분명 어리적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흐른 후 박 명장이 옳았음을 가장 먼저 인정한 것은 다름 아닌 그들이었다. 가진 게 없어서 뚝심하나로 긴 여행을 떠난 지 36년. 그가 쓴 인생의 페이지는 손때 묻어 손잡이가 반질거리는 연장이 함께한다. 후배양성을 위해, 그리고 귀금속공예의 발전을 위해 협회일과 연구에 매진한다는 그는 인터뷰 내내 작업대에서 손은 놓을 줄을 몰랐다.



36년 간 오직 한 길을 걷다


박창순 명장의 고향은 전남 구례다. 전형적인 농촌마을이니 살림인들 넉넉했으랴. 그럼에도 부모님들은 쪼들린 생활비를 아껴서 그를 고등학교까지 졸업시켰다. 대학을 들어갈 여유가 안 되다보니 마땅한 진로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을 때 서울에 있는 외삼촌이 기술을 배워보지 않겠냐고 했다. 농경사회에서 산업화사회로 바뀌어가는 70년대에는 농사를 지어봐야 비전이 없다고 해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술을 배워야 성공한다고 생각할 때였다.

그의 나이 19살. 그렇게 그는 귀금속공예를 배우기로 했다. 처음에는 양복기술을 배워볼까 하는 망설임도 있었지만 너무 여성적인 것 같아서 그만뒀다. 그렇게 시작한 지 올해로 꼭 36년이다. 긴 세월한 길만을 고집해왔으니 지루할 법도 하건만 그에게 하루는 늘 부족하단다.

작품을 하다보면 자신도 모르게 그 속으로 빠져들게 된다고. 단순히 손동작을 통해서 작품이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혼을 넣어야 작품이 완성된다고 믿는 그의 작품세계에는 늘 어릴 적 동심이 같이 펼쳐지곤 한다. 이런 박 명장을 조용히 내조해주는 아내는 항상 든든한 동료이며 친구다. 아내가 있기에 박 명장의 작품세계는 늘 안정감이 있고 잔잔한 행복이 함께한다.


“지금 힘든 거요? 아무 것도 아니죠. 처음에 이걸 배우려고 할 때는 말도 못했어요. 선배들한테 얻어맞아가면서 어깨 너머로 배웠거든요. 그런데 제가 손재주가 있고, 눈썰미가 있으니까 다른 사람보다 몇 년 먼저 기술자가 됐죠. 그 추운 겨울날 난방도 안 되는 공방에서 잠을 자다보면 밤에 추워서 잠을 설쳐야 했죠. 그래도 바람을 막아주는 공간이니 얼마나 감사했던지 몰라요. 당시에는 배 안 곯고 바람막이 있는 건물에서 잠자는 것이 최고의 행복이었으니까요. 인권은 생각지도 못했죠. 먹고 살기 힘든 세상에 인권이 어디 있어요. 안 쫓기는 것만 해도 감사해야 할 일인데요.”


인내하면서 참아내지 못했다면 지금이 없을 것이기에 힘든 그때가 오히려 감사하다는 박창순 명장. 이 작업은 섬세함과 디자인감각을 요구하는 분야다보니 창의성은 기본이다. 그러다보니 성격이 너무 급하거나 덤벙된다면 힘들 수도 있는게이분야다.


다행히 박 명장은 이런 부분에서 잘 맞는 편이다. 인내를 하는 데는 이골이 났고 차분한 성격이다 보니 하루 종일 앉아서 작품 활동을 해도 지루함을 느끼지 않는다.


“저는 시골에서 살 때 손재주가 많다는 말을 자주 들었어요. 원래 시골생활이란 게 어디서 물건을 사오는게 아니라 만들어서 사용하는 거잖아요. 따지고 보면 시골 분들은 모두 명장이죠. 생활을 하다가 필요하다고 느끼면 만들어서 사용하잖아요. 그런 환경에서 살다보니 시골아이들은 어릴 적부터 놀이를 하기 위해선 스스로 무언가를 만들어야 했어요. 팽이놀이를 하고 싶으면 팽이를 깎아야 하고, 연을 날리고 싶으면 연을 만들고, 연줄을 감을 수 있는 타래를 만들어야 했거든요. 썰매도 직접 만들어서 타야 했고요. 다른 아이들에 비해 제가 만든 것들은 모양이 예뻤어요. 그래서 친구들이 부탁을 많이 했죠. 덕분에 방 문지방은 엉망이 되어 부모님들께 꾸중도 많이 듣고 맞기도 하고요. 지금 생각하면 그게 다 명장을 만들어 주는 과정이었던 거죠(웃음).”



소박한 자연을 담아내는 작품 활동


어떤 분야든 그 길을 꾸준히 걸어가는 사람들에겐 스승의 영향이 크다. 박 명장도 마찬가지로 좋은 스승을 만났기에 지금의 명예를 얻을 수 있었다. 국내에서는 최고라고 할 정도의 감각과 실력을 갖춰 업계에서는 그 명성이 자자했던 스승의 영향은 두고두고 박 명장의 작품 활동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굉장하신 분이에요. 제가 그 분을 만난 건 정말로 행운이죠. 단지 아쉬운 점이라면 너무 실력이 뛰어나다 보니 실력만 믿고 더 이상의 준비를 하지 않은 거죠. 작품을 잘 만든다고 명장이 아니라 남들이 알아주도록 그런 노력도 필요한데, 스승께서는 그 부분을 조금 소홀히 하셨어요. 세상이 바뀐다는 것에는 인색했던 거죠.”


박 명장도 현대화의 물결에 휩쓸린 적이 있다. 수작업보다는 대량생산을 해서 수익창출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에 남들보다 먼저 기계 설비를 갖추고, 주조기계를 들여와서 주조를 붙고 일부 작업을 해서 판매시장 확대를 했었다. 그런데 자신의 가치가 아니라 기계의 도움을 받아서 작품을 만든다는 생각 때문에 기계를 다 팔아버렸다.


“작품이라는 것은 직접 손으로 만들어 내는 거지 기계가 만들어 내는 게 아니죠. 시장을 확장하려고 생각하니까 기계가 모든 것을 대신한다면 내 정체는 뭐란 말인가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렇다면 내 손으로 직접 난이도가 높은 작품을 만들어서 최고가 되어보자. 다른 사람보다 뛰어난 기술을 가진 내가 기계에 의존하다니... 그래서 기계 설비를 다 팔아버렸죠. 물론 일일이 손으로 작품 활동을 하다보면 힘든 날이 많아요.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알아주는 건 더더욱 아니고요. 그런데 요즘 어때요? 다품종 소량 생산이 대세잖아요. 그렇다면 수작업은 굉장한 가능성이 있는 거죠. 사실 사람 손으로 하는 것만큼 정교한 게 없거든요. 아무리 기계가 정확하다고 하지만 사람의 손을 따라갈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그게 수작업의 장점이고 오랫동안 이 일을 해올 수 있었던 이유죠.”


마음을 따라 혼을 넣은 작품을 만들다보면 행복감을 느낀다는 박 명장의 작품세계는 소박한 자연의 색체가 아주 짙다. 시골소년이 산과 들을 누비면서 보고 만지며 꺾었던 꽃들과 호기심 때문에 잡던 곤충들은 그렇게 그의 작품에서 다시 태어난다.
















국내 유일하게 7명인 명장


현재 귀금속공예를 하는 사람들은 많은데 단순하게 세공만 하는 사람들은 5,000명 남짓 된다. 한때 일본에 건너간 기술자들이 1,000명 정도 있었지만 IMF로 인해 시장성이 떨어진다고 생각할 때 모두 이직해 버렸다. 그 중에서도 최고의 타이틀인 명장은 국내에 단 7명이다.

명장이 되려면 우선 귀금속공예 경력이 20년 이상이 되어야 한다(너무 길다는 의견이 많아서 작년부터는 15년으로 줄었다). 게다가 최고의 소질이 있다는 것을 인정받는 전국기능대회에서 기능작 이상을 수상해야 명장이 될 수 있다. 타이틀만 놓고 보면 상당히 까다롭다는 생각이 들 수 있지만, 그의 생각은 다르다.


“자신이 하고 싶은 일을 열심히 하다가 명장이라는 타이틀을 받으면 그거야 말로 덤이잖아요. 일을 하는 게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라 본인 스스로가 좋아서 하는데 명장이 안 됐다고 속상해할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 맘이라면 애초부터 수작업을 못하는 거죠.”


박창순 명장은 시간이 날 때마다 협회일에 앞장서고 학교에 강의를 많이 나간다. 귀금속보석기술 협회 이사와 귀금속보석디자인협회 이사를 겸직하고 있으면서 동신대학교 보석공학과 교수와 재능대학 주얼리 디자인학교 초빙교수도 겸하고 있다. 그 외에도 고등학교에서 강의요청이 많이 오는 편인데 요즘은 중학교에서도 요청이 들어와 신이 난다고.


“즐거운 일이죠. 쉽지 않은 분야에 후배들이 관심을 가져준다는 데 얼마나 감사해요. 요즘 애들은 디자인감각이 있어서 앞으로 전망도 아주 밝다고 생각해요. 각자의 개성이 뚜렷한 만큼 창의성도 뛰어나거든요. 앞으로 제2, 제3의 명장이 나올 것으로 기대도 되기도 하고요.”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들이 하는 분야에는 자식은 일시키지 않다고 하는데도 박 명장의 두 아들 중 하나가 본인의 뒤를 이어가길 바란다. 지금까지 얻은 노하우를 모두 물려 줄 수 있으니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아직은 다른 분야에 공부를 더 하고 싶다는 큰 아들이 그나마 나중에라도 아버지의 뒤를 잇고 싶다고 하니 기대해보고 싶단다.

앞으로 귀금속공예가 우리나라의 중추적인 산업분야가 되었으면 한다는 그는 후배들이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 내서 제2.제3의 명장이 나오길 기대한다고 말한다. 단지 아쉬운 점이라면 정부에서 조금만 더 관심을 가지고 지원해주면 얼마든지 고급인력을 길러내서 이익을 창출할 수 있는 기반을 만들 수 있는데 그게 아쉽다고.

문명이 발달하고 새로운 제품이 눈만 뜨면 생겨나는 현시대에서는 한 가지만을 고집하고 살아간다는 건 분명 어려울 일일게다. 그러나 이들이 없다면 우리 것을 지키고 보존한다는 건 어려운 게 현실이다. 흘린 땀방울만큼이나 멋진 작품으로 탄생되는 그의 작품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소박한 행복을 담고 있기 때문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MBC이코노미/2012.0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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